하지만 내부적으로 산산 조각난 유고와 달리 모든 국가가 하나의 동체로 통합되고 있는 유럽연합이 잘 보여주듯이 진영이 붕괴되고 난 이후의 상황이 모두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컴퓨터공학과 유전공학을 중심으로 한 신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의 미래에 많은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남아프리카나 중동에서는 냉전의 해체에 힘입어 지역분쟁이 해결되고 있다.

그리고 리우 정상회담처럼 지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적이냐 동지냐 하는 이분법에 갇혀 모든 꿈과 희망을 잃어버렸던 20세기의 냉전시기와 달리 우리 공동의 미래를 함께 열어 나갈 수 있는 엄청난 물질적·정신적 잠재력이 이데올로기적 질곡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즉 지구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고있지만 동시에 객관적으로는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희망과 낙망이 교차하고 지역화와 세계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시대에는 당연히 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윤리에 새로운 양식이 요구된다. "사고는 지구적으로, 행동은 국제적으로"라는 슬로건이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사는 세계 시민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영의 해체 이후 세계질서의 변화를 주도해나가고 있는 주체는 초국적 자본이기 때문에 그에 따라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자본은 19세기의 고전적인 자본처럼 노동자계급의 강력한 견제를 받거나, 일 국내에 갇힌 자본이 아니다. 벌써 모든 국경을 초월해 거의 아무런 견제세력없이 이윤만 남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자본의 속성을 전 지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첨단 유전공학을 이용해 어떠한 농약에도 견딜 수 있는 쌀을 개발하는 미국의 다국적 곡물회사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듯이 이들이 동원하는 기술은 지금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목적을 넘어 가장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치닫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본의 흐름뿐만 아니라 영혼의 흐름까지도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상업영화를 비롯한 일부 미국식 대중문화는 건전한 오락수준을 넘어 인류의 창조적 정신을 획일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커다란 불행은 인류가 다 함께 30년 앞을 내다보면서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한 꿈을 꾸지 못한데 있다. 지구 온난화라든가 식량문제 등으로 인해 지구의 미래가 21세기를 넘어서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제기하고 있지만, 21세기를 공동으로 살아내기 위해 함께 지혜를 모아내려는 노력은 아주 미미한 형편이다.

마치 중세의 거대한 체제가 무너지고 난 다음 르네상스라는 과도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로 들어섰듯이 앞으로 맞이할 21세기초 또한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흐릿한 전망사이에서 동경과 낯설음이 교차하는 방황과 모색의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꿈꾸어야 할 때이다.

우리는 항상 제국의 주변 부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항상 근대의 형식 속에서 前근대를 살아왔다. 제국에 대한 정신적 동경은 항상 모방과 퇴행의 형태를 반복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순서대로 제국의 중심이 바뀌었지만 제국을 베끼고 모방하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지치면 우리 것이 최고 하는 식의 민족주의가 등장했다. 그리고 1910년에 봉건왕조가 무너진 후 바로 1919년에 공화제를 선포한 데서 잘 알 수 있듯이 과거와의 단절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이념의 수용 또한 신속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대통령의 생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각하"라고 부르면서도 "민주주의"는 언제나 완성되어 있었다. 1980년대까지 가파르게 근대화를 추구해오다가 채 10년이 되지 않아 "포스트모던"이 선언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두 번의 근대화 계기가 있었다. 먼저 19세기말에는 농민혁명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와 갑신정변을 통한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전자가 제국의 무력개입에 의해 실패하고 후자가 제국을 등에 업은 형태로 추구되었다는 사실자체야말로 제국의 주변 부의 삶의 고단함과 비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945-1950년의 두 번째 기회 또한 제국의 개입으로 각각 "한국적 민주주의"와 "주체적 사회주의"로 굴절되고 말았다. 최근의 문민정부 등장과 북한의 세대교체는 이 2단계의 역사적 시기다 완료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한반도는 새로운 역사적 순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말처럼 이러한 변화를 내부의 주체적 힘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다시 바깥으로부터 강력한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최근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정세는 세계의 마지막 냉전지대인 한반도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금보다 한층 기형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치못하게 하고 있다. 먼저 북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남한으로부터의 경제적 - 기술적 지원을 축으로 정경분리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중국에 이어 미국 또한 남북한에 대해 정경분리의 원칙을 취함으로써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접근법을 일찌감치 떨쳐버렸다. 이미 동남아 경제를 석권하고 동북아로 눈을 돌리고 있는 일본 또한 대륙진출의 가교 내지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에 새삼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서울이 아니라 철저히 일본과 미국을 겨냥한 "남방정책"과 함께 대남정책에서는 정경분리원칙을 견지하고 있는 북한의 태도나 최근 정경분리 원칙마저 힘들게 고수하고 있는 문민정부의 입지는 앞으로의 민족의 진로와 관련해 많은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소위 민족적 정통성을 축으로, 민족통일을 명분으로 정권을 유지해오다가 이제는 양측의 자본가 즉 북한의 개방파들(미성숙된 "관료자본가들")과 남한의 대기업들에 의해 민족의 모든 것이 좌우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러한 세기말적 변화를 제대로 전망하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위대한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먼저 상대방의 모순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대적인 이념관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행동부터 변화시켜 나가려는 새로운 사고, 해원상생(解寃相生)에 기초한 공동의 삶의 윤리, 그리고 우리의 지구는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세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열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지구 공동의 가장 절박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집중할 생각이다. 먼저 환경문제는 경제성과 이익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모든 행동과 사유방식에 대해 공존성과 이타성을 새로운 요소로 도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환경문제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고민을 통해 진정한 국제공동레의 삶의 윤리를 모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등 우리에게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문호에 대한 관심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집약되는 예술이 단순한 기술로 전략되어, 사유의 형식까지 물화(物化) 되어온 것이 서양의 비극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제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예술과 기술의 경제성은 거의 허물어져 버렸다. 이에 따라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과 함께 사고의 왜곡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문화는 상품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의심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마지막 영역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활자문화의 좁은 틀을 넘어 이미지 문화에 높은 응전력을 갖춘 미디어론이나 기호학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할 생각이다.

그리고 가족이나 여성 등 일상의 소소한 일로 치부되나 태고적부터 미시권력이 자리잡고, 우리의 의식과 삶을 무의식적으로 감시하고 지배해온 부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가 소개하게 될 아날학파의 업적은 이 부분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다면적이고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괴테는 "성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모든 영혼을 함께 모으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지혜를 모아 우리 공동의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신적 형식을 준비해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 편집동인이 추구하는 소박한 바램이다.

1994년 11월 30일 '21세기 총서 : 우리 공동의 미래' 편집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