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신학과 에큐메니칼 운동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구 미 정 박사
(협성대 신학연구소 연구원)

1. 들어가는 말

지구는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들의 유일한 집이 명백한 위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자멸의 벼랑 끝에 서 있다.

부인할 수 없이 우리가 사는 오늘은 위기의 시대이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지구적으로도 '안전'이라는 말에 먼지가 앉은 지 오래되었고, 그저 하루하루가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다. 모두들 생존을 위해 동동거리면서도 만족은커녕 불평과 불만만 쌓여간다. 그러한 내적 감정이 외적 분노로 폭발하는 광경을 종종 보게 된다. 참을성 없음/너그럽지 못함이야말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집단 성격을 나타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사람마다 전부 화가 나 있다.

아니, 최소한 언제든지 버튼만 누르면 화를 낼 채비가 단단히 되어 있는 기계처럼 보인다. 왜일까? 무엇이 그토록 우리의 화를 돋구는 것일까? 우리의 화냄은 정당한 표적을 향하고 있는가? 혹시 나와 이웃하고 있어서 자주 부대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화를 전가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는 거대한 세력/구조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사소한 시비에 목숨을 걸기보다는 그 은폐된 세력/구조를 드러내고 명명하고 그것에 대항하는데 우리의 분노의 흐름을 다스려야 하지 않은가?

2. 자멸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자폐아들

현대인의 특성 내지는 병적 징후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자폐증'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만의 세계에 안주하여 다른 사람/자연/신과 충분히 교감하지도, 의사소통하지도 못한 채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말이 넘쳐나기는 하지만 공허하고, 행동이 분주하기는 하지만 부산할 뿐이며,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진지하지 못하다. 스스로의 벽에 갇혀 다른 존재와의 사귐과 대화를 나눌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존재방식만을 지루하게 되풀이하는 자폐증 환자가 바로 현대인의 자화상인 것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자폐증은 무엇보다도 서구문화의 근간이 되었던 유대-기독교 전통과 헬레니즘 사상에서 찾아진다. 광야의 떠돌이라는 생존의 악조건과 농경민족과의 투쟁 속에서 자라난 야훼 종교가 선민의식을 토대로 한데서 자폐증의 단초를 볼 수 있다. 민족의 형성기에는 선민의식이 민족적 주체성 확립에 공헌하지만, 민족의 융성기에는 오히려 민족적 자만과 타민족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시키게 되며, 외세의 오랜 지배를 받는 시기에는 배타성이 두드러져 자폐증의 증상을 나타내게 된다.

유대 종교를 모태로 하는 기독교는 일단 보편주의적 종교로 출발하였으나,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육체/물질/감성이 초자연/영혼/정신/이성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어거스틴에 이르러 인간의 구원이 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로 국한되면서 자폐증이 강화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후 기독교 세계(Christendom)를 이루고 난 뒤로는 이방문화와 이방민족에 대한 종교적 배타주의, 문화적 우월주의, 인종적 독선주의 등이 자폐증을 악화시켰는데, 이렇게 악화된 자폐증은 이방인들에 대한 '정복 콤플렉스'로 방향을 바꾸어 개종주의, 십자군주의로 표출되었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산력 증대와 전쟁무기의 급속한 진보가 이루어지자 제국주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의 발전에는 근대적 세계관, 즉 갈릴레오-데카르트-베이컨-뉴턴의 과학사상에 근거한 기계론적 철학과 민족주의, 산업자본주의의 공헌이 크다. 철학자이자 생태역사가인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과학/산업혁명기에 점진적으로 일어난 '자연의 죽음'이 오늘의 생태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그 격동의 세월을 겪는 동안 근대인의 가슴속에서 자연에 대한 이미지에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자연의 죽음이 유발되었다는 것이다. 고대인의 마음에 새겨있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자연은 '양육하는 어머니'의 이미지에 기초해 있었는데, 과학/산업혁명을 통해 그러한 이미지는 온데 간데 없고, 오히려 자연을 한낱 기계로, 원료로 보는 관점이 자연 착취와 정복을 문화적으로 승인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의 죽음은 또한 이방민족들의 죽음과도 그 역사적 맥을 같이 한다. 기계론적, 물질주의적, 팽창주의적 세계관을 등에 업고 진보사관으로 치장한 서구의 제국주의는 그들의 정복 콤플렉스를 계속해서 발산할 대상, 즉 새로운 식민지가 항시 필요했기에 이방민족들을 자신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객체로 제압해 나갔다. 기독교는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기보다는 기꺼이 야합하여 종교-문화적 제국주의의 옷을 덧입고서, 토착민들의 종교적 유산과 민족적 정체성, 그리고 자연에 대한 공경심을 '야만과 무지'라 규정짓고 소위 '기독교식'으로 개조하는데 몰두하였다. 여기서 '기독교식' 개조란 서구의 이원론적, 시간(역사)중심적, 기계론적,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강제적 주입을 말한다. 존 힉(John Hick)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의 우월 콤플렉스는 서구 제국주의의 약탈을 뒷받침해주고 승인해 주었다'.

오늘날 지구상의 뭇 생명들에게 죽임의 위협과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생태계 파괴의 현실 앞에서 기독교가 희망의 근거가 되기보다는 도리어 걸림돌로 지목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생태학의 고전/복음'으로 불리는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논문이 나온 이래로 기독교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서구 문화의 자폐증과 정복 콤플렉스를 타 문화권에 이식시킨 장본인으로서, 또한 현대인들로 하여금 소비지향적, 맘몬숭배적 쓰레기 문화에 중독 되도록 방기한 장본인으로서 기독교는 여전히 대중의 지지를 상실한 채 '게토화'되어버려 몰락하는 기로에 처해 있다.

그러한 운명으로부터 이 땅의 기독교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찢어지느니 교단이요, 세워지느니 십자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교회는 교파간 분열과 교회간 경쟁을 지상명령으로 삼고 개인구원과 물질의 축복, 교회 팽창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비기독교인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 환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개인의 고유한 가치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현대인들의 감성에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어필하기는 만무인 것이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1997년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에 따르면, 한국의 비종교인들(18세 이상 전체 인구의 53.1%) 가운데 과거에 개신교 신자였다가 비종교인으로 이탈한 사람들이 73%, 불교와 카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 각각 23.6%와 12%로 나타났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종교단체가 '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확장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79.6%)이라고 한다. 랭던 길키(Landon Gilkey)의 비판이 가슴을 울리는 대목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도덕적으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것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이며, 비영성적이며, 실제로 윤리적이라고는 거의 말할 수 없는 신앙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커녕, 욕과 주먹질 세례다. 고립된 피부 캡슐에 쌓인 자아 개념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복거(卜居)와 상생(相生)의 원리'에 충실한 생태적 자아 개념이 그리 낯설 수가 없다. 그러니 본래 더불어 살고 서로를 살리며 살게끔 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 바탕과는 상관없이,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한히 정력적이고 기능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어느새 '협동과 연대와 자비의 종교적 윤리와는 정반대인 세계화 시대의 윤리, 곧 경쟁과 지배와 무관심의 윤리'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다들 타자에게, 혹은 무고한, 힘없는 약자에게 화를 내고 산다. 진짜로 화를 내야할 대상, 우리로 하여금 매순간 울화통이 터지게 만드는 악의 구조를 올바로 짚어내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웃/자연에 분을 풀고 산다.

하루아침에 1750명의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일터에서 내모는 현실, 세계 인구 가운데 '358명의 초특급 부자들의 재산 총액이 지구촌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25억명의 전 재산을 합친 것과 맞먹는' 현실이 정작 우리가 화를 내야할 대상이다. 전세계 인구 가운데 약 12억명이 하루 1달러도 채 안되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매시마다 1,500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어가는 현실, 그 반면에 산업화된 선진국의 소수는 세계 자원의 75%, 세계 곡물 생산의 88%, 세계 무역과 투자의 80%, 세계 산업의 93%, 그리고 과학기술 자원의 거의 100%를 통제하고 있는 현실에 화가 나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2030년까지 9억명에서 18억명이 추가로 굶어 죽어야할 형편에 놓인 현실에, 또한 전세계적으로 환경 난민이 5천만명에 달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더운 지구에서 살게 될 것이 예상되는 21세기, 침수와 폭풍, 가뭄과 기근의 세기로 전망되는 시대적 현실에 화가 나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실패는 우리가 정당하게 화를 내야할 표적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데 있다. 우리를 서로 이간질시켜놓고는 교묘하게 숨어버린 세계화 전략의 음모를 밝히지 못하고, 다만 편협한 교리논쟁에 빠져 종교간, 교파간, 교회간 경쟁과 반목을 일삼은 데 실패의 원인이 있다. 이 땅의 기독교는 이러한 자기 반성과 현실 각성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핵의 위협,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전쟁, 그리고 생태 위기'라고 하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시한폭탄이 제거되지 않는 한, 현대인은 모두 불안하고 초조하며 강박적인 홧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가, 프로이드가 말한 '강박적 노이로제'에서, 혹은 마르크스가 말한 '민중의 아편' 노릇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현대의 '죽음의 문화'에 대항하는 '생명의 문화'를 주창하는 길밖에 없다. 지구상에 대량학살의 교의를 퍼트리고 있는 죽음의 문화에 대하여 화를 낼 때, 우리의 분노는 비로소 '하나님의 분노'(divine madness), 곧 하나님의 미칠 듯 분통터지는 심정에 맞닿을 수 있을 것이다.

3. 절뚝거리는 야곱 - 생명의 선교를 위한 은유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다양한 해방신학 - 남미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 여성해방신학, 제3세계 해방신학 등 - 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고난의 한가운데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증언하면서 사회정의에 호소하는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착취와 억압의 범주가 자연/생태계로 확대되는 인식론적 전환이 일어남에 따라 세계 안에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생태정의(eco-justice)를 요청하는 생태신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통적인 신학의 중심질문, 곧 '내가 어떻게 하여야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어거스틴, 루터 등)도 변모되었는데, 이를테면, 60년대에 신학의 컨텍스트가 중심에서 주변으로, 즉 서구 부르조아 백인 남성으로부터 다양한 타자에게로 이동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이 불의한 세계현실을 변혁시킬 것인가?'(구티에레즈, 몰트만 등)로 바뀌었으며, 70년대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모든 생명이 살 수 있도록 녹색 지구를 구할 것인가?'(샐리 맥페이그, 토마스 베리 등)에로 모아졌다.

이러한 일련의 기독교 신학과 선교정책에 있어서의 반성적 계기에 주목해 보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표방한 1968년의 남미 주교단회의(일명 메델린 회의)를 제2의 종교개혁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생명을 위한 우선적 선택'(preferential option for life)을 강조하면서 '정의촵평화촵창조의 보전'(JPIC)을 공식적으로 처음 명문화한 1983년 WCC 제6차 총회(일명 벵쿠버 대회)를 제3의 종교개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맥락 속에서 '생명의 선교'에로 부름받고 있다. 존 캅(John B. Cobb, Jr.)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 교회의 쇠퇴가 '미적지근함'이라는 영적 질병에 걸린 때문이고, 이는 결국 교회가 자신의 신학적 소명을 방기(放棄)한데서 비롯되었다면, 이제 교회는 생명신학을 그 자신의 목회적, 선교적 원천으로 삼아 '서로 살림'의 과제에 투신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역할 수행을 위해 도움이 되는 신학적, 성서적 은유로서 '절뚝거리는 야곱'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인간 군상 가운데, 개인주의와 물질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경쟁과 권모술수라는 세계화의 논리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로 야곱, 정확히는 얍복강변 이전의 야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태중에서부터 형 에서와 싸웠고, 태어날 때에도 형보다 먼저 나오기 위해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으며, 절제력이 약한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들이고, 연로한 아버지를 속여 축복권을 가로챔으로써 형의 원한을 샀다(창 25:22-34; 27장). 외삼촌 라반의 집에 몸 붙이고 사는 동안에도 속고 속이며 뺏고 빼앗는 머리싸움을 통해 라반의 딸들을 얻고 재산도 불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의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결과 경쟁, 속임수와 약탈로 얻어진 풍요는 결코 참된 행복이 아닐뿐더러 사악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제 야곱에게 남은 과제는 형 에서와의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인간이 결코 혼자 살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이 때 치유의 방식은 놀랍게도 예수의 방식과 동일한데,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 결단이 심리적 자기만족에서 끝나서는 안되고 사회적 실천으로 외화(外化)되는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는 지침이다.

얍복강변에서 자신의 재산을 형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정한 후, 홀로 남아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에서 나눔을 통한 화해에 이르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것은 아픔이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이다. 자발적 나눔의 영성은 자기 부정과 포기의 아픔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결코 삶으로, 실천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이제 환도뼈가 부러져 절뚝거리는 야곱은 더 이상 앞만 보고 달릴 수 없게 되었다. '속도'를 숭배하는 사회에서 절뚝거림은 그에게 새삼 '한계'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1970년도에 로마 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들고 나왔을 때, 그것을 우리의 얍복 나루로 삼아야 했다.

1992년에 전세계 110여개국 정상들과 178개국 대표단이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로에 모여 유엔 환경개발회의(UN Conference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를 열었을 때, 이로써 우리의 환도뼈를 부러뜨리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지구정상회담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우리 시대의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리어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최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당시에 명목상 채택된 기후변화협약을 실제로 이행하고자 1997년에 국가간 협약으로 맺어진 교토의정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의 시계를 10년 전으로 되돌려놓기까지 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시대에 주어진 몇몇 은혜의 때에 올바로 응답했더라면, 무한한 이기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 귀가 멀지 않았더라면, 1분에 축구장 10-20개에 해당하는 열대림이 파괴되고 매일 136종의 생물종들이 사라지는 이 무서운 생명 파괴의 속도가 조금은 늦추어졌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상극(相剋)과 공멸(共滅)보다야 살아서 절뚝거리는 편이 한결 나음을 분별할 줄 알았더라면, 우리 역시 야곱처럼 친족(kin)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복을 누렸을 것이고(창 33:10), 넉넉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친족공동체(kindom of God)를 세워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회복하고 밖으로 전파해야할 영성은 바로 얍복강변 이후의 '절뚝거리는 야곱'의 영성이다. 이 영성은 전통적인 자폐증과 정복 콤플렉스를 부추기는 탈역사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영성과 결별하고, 지배와 착취, 독점과 대량학살로 구조지워진 총체적인 죽임의 체제를 고발하는 영성이다.

또한 그 속에서 무한경쟁에 살아남은 최대 20%의 상위권을 제외한 나머지 80%의 가난한 사람들을 '잉여 인구'로 몰아 노예화하는 그릇된 이분법에 도전하면서, 침몰해 가는 타이타닉호에서 갑판 위의 의자만 바꾸는 것으로는 구원도, 희망도 없음을 인정하고 근본적인 의식혁명과 영적 혁명을 통해 생명 문화를 펼쳐나가는 영성이다. 루카스 비셔(Lukas Vischer)의 말처럼, '인간 사회의 지속가능성은 궁극적으로 변화를 위한 도덕적 힘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교회는, 현대인의 도덕적 능력을 마비시켜서 '아무리 애쓴들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과 허무주의, 그리고 패배의식을 부추기는 '실천적 무신론의 소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는 '종교가 가장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인 '생명문화와 연대성 문화의 함양'을 위해 자신의 선교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야 할 때이다.

4. 에큐메니칼 생명운동을 위한 제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생명, 즉 온전하고 충만하며 쪼갤 수 없는 생명이다. 고통 중에 신음하는 이 대멸종의 시대에 만물은 더 이상 '오만한 눈'이 아닌 '애정 어린 눈'을 갈망한다. 그 눈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바라보시는 시선, 마치 어머니가 자신이 낳은 자녀를 바라볼 때처럼 그렇게 자비와 연민으로 가득 차서 행여 생명이 상할까, 다칠까, 깨질까 염려하며 돌보는 그런 눈이다.

오늘날 교회가 새롭게 전파해야하는 생명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처럼 애정 어린 눈으로 피조세계를 바라보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 속으로 생명 - 온전한 생명, 충만한 생명, 상처받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보내신다는 사실이다. 선교가 본래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면, 그 하나님의 선교란 다름 아니라 이 세계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는 일이다.

성령은 창조적으로 살리고 치유하는 '생명의 영'이며, 그로부터 생명력이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생명의 샘'이다. 이 성령의 세계 내 현존이 꺾일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 사랑과 파괴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의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선교는 죽음의 문화의 한복판에서 '절망과 체념의 윤리'를 유포시키는 '세련된 자포자기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다시 살아날 용기를 퍼뜨리는 생명운동이다. '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오는 것'(cogite intrare)이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와 만물의 새 창조에 대한 희망으로 초대하는 것이 생명의 선교인 것이다.

한스 큉(Hans K ng)은 21세기를 위한 슬로건이 무엇보다도 지구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책임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인간이 지금보다 커져야 한다'는 요청이라고 강조했다. 이 말은, '자멸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위기상황 속에서도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에 투신하기는커녕, 양적 성장논리에 사로잡혀 작고 힘없는 교회들을 잡아먹는데 혈안이 된 일부 한국교회들이 특히 경청해야할 말이다.

한국교회는 WCC가 1998년 제8차 총회(일명 하라레 대회)에서 천명한 주제,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라 - 소망 중에 기뻐하라!'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라!'는 말은 창조와 역사 속에서 활동해 오신 하나님,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백성을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지속시키고 계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에게 순종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소망 중에 기뻐하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돌아서기 위한 근거이자, 하나님에게 돌아선 삶의 특징적 가치로서 이 시대의 교회로 하여금 희망의 공동체가 되도록 당부하는 말이다.

소망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키신 행위(롬 1:4)에 뿌리박고 있다... 소망은 죽임의 세력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no!)를 선포하는 것이다.

제8차 하라레 총회가, 제1차 암스텔담 총회(1948년) 이후 50년만에 맞이하는 희년 총회라는 사실은, 그 당시의 교회일치에 대한 관심과 책임사회에의 요구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증하는 동시에, 제3천년기의 기독교 역시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책임윤리에 헌신해야할 큰 과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라!'는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교파별 이해를 넘어서서, 더 나아가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넘어서서 다른 교파를 향해, 다른 기독교인들을 향해 서로 마음을 열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 명령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내면으로 돌아서서 우리가 가슴속에 어떤 하나님 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별하라는 요청'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식의 제약성과 오류의 가능성을 용납하고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다른 교파로부터 배우기 위해 겸손히 대화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우리가 돌아서야 할 하나님은 그 어떤 교파적, 인간적 이해도 뛰어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은 곧 자신의 독선과 오만과 편견을 회개하고 인간중심적, 패거리 중심적 가치관으로부터 생명중심적, 공동체적 가치관으로 전환하는 일을 포함한다. 여기서 바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가 지구를 향한 회개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생명이 유린되고, 짓밟히고, 왜곡되고, 조작되고, 변형되고, 찢기고, 버림받는 한복판에서 '정의촵평화촵창조의 보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보라. 폭력과 죽음이 생명을 위협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생명 살림의 선교를 펼쳐나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껴 보라. 이 땅의 교회를 향해 미칠 듯 분통터지는 심정으로 당부하시는 하나님의 이 소리에 귀기울여 보라.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신명기 30:19)